연극 시련 (2007.4.28)
연극 시련을 보고 왔습니다. 토월극장은 작년 11월에 서푼짜리 오페라를 보았던 곳이군요.
3시간 30분이나 되는 긴 연극인데 역시나 관록있는 배우들의 연기여서 그런지 힘이 느껴지는 연극이었습니다.
끝나고 뒷풀이가 너무 땡겼지만 허벅지살을 바늘로 콕콕 찌르며 집으로 왔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등산을 가야해서요.
작품에 대한 소개는 다른 글로 대신합니다.
http://cafe.naver.com/ArticleRead.nhn?clubid=10102035&menuid=&searchtype=1&query=%BD%C3%B7%C3&page=2&articleid=32479
작품소개
< 시련>은 매카시즘적인 마녀사냥에 맞서 자신의 명예와 존재가치를 지켜가는 순교자의 삶과 희생을 밀도 있게 그려낸 아서 밀러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밀러는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과 1600년대의 마녀재판을 연결하여 극단적 이데올로기와 집단적 광기에 의해 파멸하는 개인의 인권과 그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다. 세일럼의 마녀재판을 매카시즘이 거세게 일던 당시의 미국현실에 교묘하게 결합하여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비판을 가함으로써 비단 특정 사건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초월성과 가치를 획득하여 삶에 대한 보편성과 영원성을 제시한다.
< 시련>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내세우는 명분은 다르더라도 집단과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광기와 희생,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끈질긴 투쟁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반복되는 역사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집단적 정의라는 허울과 비양심이 어떻게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고 거짓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는지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타락한 정의와 부정한 집단에 맞서는 소시민의 도덕적 용기와 진실을 발견하게 한다. <시련>은 거대한 '악'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진실한 '선'을 메시지로 전한다.
이제 개인적으로 느낀 것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전반적인 줄거리는 다른 글을 참고하면 될듯.
글소개를 보니 이 극의 원작자 스스로가 미국의 매카시즘의 희생자(빨갱이로 몰아쳐 몰아내던 시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극을 쓰게 된 목적을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아래 들었던 것은 아마도 다른 분들이랑 생각이 많이 다를 수 있을 듯 한데 이렇게도 한번 볼 수 있지 않느냐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될듯.
ㅇ 10대 소녀들이 문제인가??
극에서는 10대 소녀들의 행동이 아주 무시무시하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종교라는 명목하에 사람의 감정을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에 대한 저항, 일탈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애비게일이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농부 프락터의 부인을 죽이려는 충동이야 문제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상황들은 어떤 글에서 표현했던 "소녀들의 집단 광란"이 아니라 그 사회의 "집단 광란"이 먼저 문제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후반부에서 한 친구가 거짓말을 했던 것을 후회하고 다시 진실을 말하지만 다른 10대소녀들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합창을 합니다.
저는 그것이 한 사회의 "집단 광란"이 얼마나 사람을 무너지게 만들고 또 비참하게 만드는가 생각이 들면서 전율이 흘렀습니다.
또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진실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경쟁사회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 10대 소녀들 또한 그 피해자입니다.
ㅇ 남성중심적 시각?
원작이 원래 그런지 아니면 극을 만들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극 자체만 본다면 10대 소녀들은 집단적 광란으로 "저 애들 왜 그래"라고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들 또한 사회적인 광기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시각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비게일이라는 소녀의 육체적 욕망만 크게 부각이 됩니다.
주인공 존 프락터의 아내는 남편의 외도에 수동적으로만 대응을 하다가 막판에 사랑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말그대로 여러가지 힘겨운 과정이 있었지만 다시금 "사랑만세"를 외칩니다.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레베카가 있지만 제가 보기엔 이건 여성성이라기보다는 노인이라는 의미가 더 크게 그려진 듯 합니다.
이 극에서 그려지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철부지 10대, 순종적인 여성, 그리고 노예와 하녀들입니다.
물론 중세시대 자체가 그만큼 억업과 불평등이 심했고 여성에 대한 차별도 심했던 부분은 있을 것입니다.
ㅇ 존 프락터, 주인공은 정의의 화신인가?
존 프락터,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중세시대 배경으로 따지면 봉건지주가 될 듯 합니다.
이 연극의 주제은 아니겠지만 그러한 봉건지주를 지탱했던 것은 노예노동이었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닌 사람이겠지만 노예, 하녀에게는 채찍을 들 수 있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 시대때 만약 당신이 노예로 태어났다면????
주인공은 순교자의 길을 선택하지만 노예의 죽음은 개죽음으로만 끝납니다.
ㅇ 권력지향! 자신의 기득권 유지!
그나마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 하고 유연성있는 듯한 그 판사도 결국은 대부분 사형으로 판결을 합니다.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귀는 꽉 막혀있고 또 사회적인 광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데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유지를 위해 신앙을 이용합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중세의 문제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ㅇ 우리안의 광기에 대하여
위의 소개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이 극은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과 1600년대의 마녀재판을 연결하여 극단적 이데올로기와 집단적 광기에 의해 파멸하는 개인의 인권과 그 실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결코 중세시대만의 이야기도 아니며 미국만의 상황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또한 이러한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날아갔습니다.
작년에는 황우석이란 사람을 통하여 다시 한번 우리 사회의 집단적 광기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IMF 이후 세상은 점점 더 경쟁력만 요구하고 인간다운 삶보다는 현실에서의 생존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절반이상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였고 이젠 이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렸습니다.
한미 FTA라는 광풍을 통하여 이제 농촌은 망할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이것또한 중세시대처럼 극단적인 세계화, 개방화 이데올로기에 파묻현 집단적 광기의 시대가 아닐까요???
ㅇ 나가면서
때론 즐겁고 웃는 연극도 좋지만 시련처럼 보고나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연극도 좋은 것 같습니다.
위에서 제가 말했던 것은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이 연극의 원작을 생각하면 약간은 지나친 비판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중세시대를 배경삼아 당시 미국의 집단적 광기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만든 것이니깐요.
관록있는 배우들의 힘있는 연기를 통해 연극의 맛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대학로의 작은 극장과는 다르게 시설이 훨씬 좋으니 무대배경이나 시설도 연극 관람에 훨씬 좋지요.
다시 한번 또 볼만한 연극이었습니다.